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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을 것 같던 더위도 느슨해져 아침저녁으로 시원해진 공기를 피부로 느끼는 요즘입니다. 한번 잠들면 잘 깨지 않는 편인데, 올해는 이상하리만치 더워서 깬 날들이 많습니다. 한밤중에 깨서 밤에도 꺾이지 않는 더위에 감탄하며, 선풍기 대신 에어컨을 틀고서 아침에 목 건조를 호소하며 일어나는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여름이 가는 건 늘 아쉽습니다.
무언가를 오랫동안 좋아하면 좋아하게 된 이유를 잊어버리고 맙니다. 좋아하게 된 이유는 지워진 채, 좋아한다는 감각만 남은 것들. 최근에 다녀온 발리도 마찬가지로, 언제부터 가고 싶어 했는지, 왜 가고 싶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오래전부터 꿈의 여행지였습니다. 작년부터 친구와 계를 시작해서 ‘발리에서 생길 일’이라 이름 지은 모임 통장에 차곡차곡 돈을 모아 다녀왔는데, 연차를 5일이나 내어 꽤 길게 다녀왔음에도 여행 중반부터 돌아가기 아쉬워, 꼭 다시 오자며 친구와 약속했습니다. 돌아오자마자 다음은 아이슬란드에 가자며 새로운 여행계를 계획합니다. (모임 통장 이름은 ‘아이슬란드 갈란드’로 지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생애 처음으로 스노클링을 했는데, 그게 하필 발리였고, 물이 맑다 못해 투명했고, 가오리와 거북이도 보았습니다. 게임에서 보스맵부터 먼저 깨버린 느낌이긴 하지만, 물 속 세상은 황홀했고, 덕분에 스노클링의 매력에 푹 빠져서 프리다이빙을 배워야겠다는 새로운 목표도 생겼습니다. 아무튼 저는 발리에서 아주 새까맣게 타서 돌아왔고, 누가 봐도 끝내주는 휴가를 보낸 사람이라는 인상을 폴폴 풍기며 다니는 중입니다.
여름도 ‘너무 오래 좋아해서 좋아하게 된 이유를 잊어버린 것’들 중 하나입니다. 하루에 샤워를 몇 번씩이나 하고, 새로 꺼내 입은 옷도 잠깐 밖에 나갔다 오면 땀에 흠뻑 젖어 세탁기행을 면치 못하며, 밥 대신 더위를 잔뜩 집어먹고 입맛을 상실해도, ’아 역시 나는 여름이 좋아. 이래야 여름이지.‘ 하며 합리화 내지는 객기를 부리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진지하게 내가 왜 여름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기도 합니다.
저는 왜 이렇게 여름 찬양론자가 되었을까요?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를 대라고 하면 딱히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제가 좋아하는 여름의 면면들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우선 여름은 초여름, 본 여름, 늦여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저는 본 여름을 가장 좋아하고 초여름을 그다음, 늦여름을 그다음으로 좋아합니다. 초여름의 풀들은 초록이 아닌 연두로 빛이 납니다. 봄에 새싹들이 피어나면 앙상하고 황망하던 가지들 위로 작고 앙증맞은 연둣빛이 맺히는데, 5월과 6월 사이에 그것들이 온 세상을 뒤덮어버립니다. 6월 초의 풍경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마치 모든 나무와 꽃들이 “이제 내 세상이야! 기분 너무 좋아!”하고 외치는 것 같달까요. 나무에 표정이 있다면 하루 종일 싱글벙글 웃고 있을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저 또한 싱글벙글한 기분이 됩니다.
그러다 7월에 접어들며 본 여름이 시작됩니다. 장마가 지나고 나면 한층 깊어진 초록을 마주합니다. 물을 잔뜩 빨아들여 한껏 피워낸 잎사귀들은 늠름한 면모를 뽐냅니다. 바닷가에 누워 있으면 비치타월이 금방 땀으로 젖고, 이쯤 되면 바람도 더운 기운만 잔뜩 머금고 있어 땀을 식혀주지 못합니다. 사정없이 내리꽂는 햇빛에 바다가 번쩍이고 공기에는 묘한 생동감이 흘러넘칩니다.
8월 중순은 더위가 극으로 치닫습니다. 절기로 입추와 처서가 지나면 거짓말처럼 선선해져, 이제 여름도 한풀 꺾였나 싶다가도 대낮의 더위에 혀를 내두릅니다. 그래도 그늘에 가면 시원합니다. 사실 이 때가 날씨로는 가장 좋긴 한데, 문득 시원해진 밤 공기를 알아차리면 이제 여름도 정말 끝이구나 싶어서 서글픕니다. 그래서 늦여름이 가장 덜 좋습니다. 무엇이든 떠나보내는 것에는 적응되지 않습니다.
저의 여름은 이렇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한동안은 발리에 빠져있었고, 연차를 내고 태닝을 하러 다녔고, 바다수영을 한껏 했고, 외부 일으로 이래저래 바빴고, 버겁다는 생각도 종종 들었지만 이제와서 보면 별 것 아니었고, 매우 뜨거웠고, 한풀 꺾이는 듯 꺾이지 않았습니다. 올해 5월 부터 이번 여름은 정말 기가 막히게 즐겨주겠다는 다짐을 했는데, 이정도면 꽤 잘 즐긴 것 같습니다. 내년 여름에는 정말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여름 즐기기에 집중해야겠다는 각오도 해봅니다. |